성전에서 만난 사람

작성자
gfgc
작성일
2016-06-14 11:28
조회
433

성전에서 만난 사람
사도행전 3:1-10
2016.05.15. 강북꽃동산교회 스승의 주일

5월 15일, 오늘은 스승의 날입니다.
교회적으로 오늘은 스승의 주일이며, 성령강림절이며, 가정의 날 이기도합니다.

어제 스승의 날과 관련된 한 뉴스를 보았습니다.
뉴스에 핵심은 촌지, 선물이었습니다. 교사에게 주는 촌지, 선물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자 정부는 촌지가 교사에게 전달되지 못하도록 다양한 장치를 해놨습니다. 현행법에 교사가 학부모로부터 시가 5만원이 넘는 선물을 받으면 안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돈이든 물건이든 상품권이든 온라인 상품이라도 안 됩니다. 교사가 교실에 없을 때 학부모가 교무실에 들어와 책상서랍에 촌지를 넣었는데, 교사가 그것을 쓰면 그것도 받은 것으로 간주 되어 처벌을 받는 다고 합니다. 그런데 10만원 상품권이라도 5만원에 할인해 샀다는 증거가 있으면 가능하다고 합니다.

뉴스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학생과 교사, 학부모와 교사를 철저히 차단하고 있구나. 문론 이런 상황이 오기까지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교사와 학생관계가 지식전달 관계만 있다면, 인격과 인성, 인간관계 등은 어디서 배워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교회에도 영향을 주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는 스승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교입니다.
이유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최고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스승이신 주님은 제자를 삼으셨고, 제자들에게 또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자연스럽게 스승과 제자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스승의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스승으로 보내 주신 것처럼 또한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도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성령님을 스승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최고의 스승 성령님이 계십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또한 하나님은 시대 시대마다 성경을 풀어 해석하는 영적 스승을 주셨는데, 구약시대는 여러 선지자들 이여였다면 신약시대는 베드로와 바울 같은 사도입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그 직분을 목사, 장로, 교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엡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희 집은 스승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영적 스승이든 육신적인 스승이든 부모님 이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생 변함없이 섬겨야 한다는 것이 소신입니다. 그분들이 우리에게 준 것은 물질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주었습니다. 물질로 헤아려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주었습니다.

사회학에서 사람을 관계적 동물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유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고,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땅을 살아갈 때 누구를 만나느냐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누구를 만났기 때문에 성공하기도 하고, 누구를 만났기 때문에 실패를 하기도 하지요.

오늘 본문에는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40살 쯤 된 남성인데, 나면서부터 선천적으로 장애를 입은 사람입니다. 다리에 문제가 있어서 혼자의 힘으로 걸 수 없는 사람입니다. 말하고 듣고 의사를 표현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또한 손을 움직이는데도 문제가 없고 음식을 먹고 사는데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발목에 힘이 없어서 혼자의 힘으로 움직이거나 외출이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매일 성전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안타깝게 하는 것은 그가 매일 성전에 와 있으면서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모른 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할 줄 모르고 찬양도 모르고 예배도 드릴 줄을 모릅니다. 성전 안에서 죄인들이 죄 용서를 받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고, 새 삶을 사는데 그는 그런 일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어째서 성전에 있으면서 성전에 일을 모르는 것입니까?

1. 성전에 두는 사람

그가 만난 사람 때문입니다.
우리는 2절에서 아주 특별한 단어를 발견합니다. “사람들이 메고 오니,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지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40대의 한 사람이 날마다 성전에 와 있는데,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짐짝처럼 메워 성전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에 오기는 오는데, 예배를 드리는 자리가 아니고 사람들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출입구인 미문이라는 곳 까지만 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날마다 그를 데려다가 이곳에 내려놓고 갔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걸을 수 없는 그는 성전에 있으면서 성전 안에는 못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왜 이곳에 두고 갈까요? 몇 발작만 더 가까이 앞으로 나가면 십자가가 있고 전능한 하나님이 계시는 은혜의 보좌가 있는데, 그런데 그들은 그곳에 두고 갔을까요?

도대체 그를 성전에 데려온 사람은 누구입니까?
성경에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메어다가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 기위해서 날마다 성전 문에 두는 자”라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누군지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가 누구 같습니까?
정황상 앉은뱅이 거지를 이용하여 돈을 걷는 사람으로 보여 지지 않습니까? 아니면 그의 가족, 친척이 아닐까요?
어쨌든 그들을 나쁘게 평가할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정확하게 평가한다면 그들은 복음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성전이 떤 곳인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 역시 성전 안에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 앉은뱅이가 만났고, 그에게 가장 영향을 주는 사람들은 그냥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어떤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앉은뱅이는 한동안 이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누구를 만났느냐에 따라서 성전에 들어 갈 수도 있고, 들어가지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날마다 성전에는 와 있지만, 성전 미문에만 있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는 한 발짝도 나오지 못 할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 이런 일이 있답니다.
어떤 분이 새 신자를 인도했는데, 새 신자가 갑자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니까 그를 불러 놓고 하는 말이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 차자하면 된다. 십일조는 좀 더 있다가 하라.”
그래도 말을 잘 듣지 않자 또 불러서 말하더랍니다. “너무 나데지 말라.”

여러분은 누구에 의해서 이 선정에 들어오셨습니까?
우리는 그를 스승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스승으로써 나와 관계있는 사람이 은혜의 보좌로 가까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듯이 어떤 사람이 스스로 성전에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이 성전에 들어오고 은혜의 보좌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2. 베드로와 요한

매일같이 사람들 등에 엎여 성전에 왔던 사람은 성전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어찌 보면 모두가 기도하는 사람들 입니다. 어찌보면 모두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공식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있는데, 오늘 성경은 그 기도시간을 제 구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앉은뱅이는 사람들에 의해서 메여 성전 문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다른 날과 같이 앉은뱅이는 자신을 메고 온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눈은 땅을 보고 손은 사람들을 향해 들고 앵무새처럼 늘 하던 멘트는 날리는 순간~ 그동안 없었던 일이 생겼습니다.

다른 때와는 전혀 다른 기운이 느껴지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다가오더니 바로 눈앞에서 서더니 벼락과 같은 소리를 자기를 지적했습니다. “이 보시오. 우리를 보라.” 눈을 들어 보니 그의 앞에는 두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는 성전에 오랫동안 이렇게 와 있었지만, 자기에게 이렇게 말을 거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복음은 말과 들음을 통해서 전달된다고 볼 때, 오늘 앉은뱅에게는 역사적인 날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를 보라고 말하는 자가 누구냐?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이냐, 무슨 일을 할 것이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를 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4절에 나와 있는 대로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한 때 예수님은 배반한 적도 있지만, 그는 다시 회개하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 예루살렘 어느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한바 있는 사람입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안됐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세상에 누구보다 마음이 뜨거운 사람입니다.

그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는 말을 했습니다.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평생 한 번도 자기의 힘으로 걸어보지 못했던 그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비로서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오늘 갑짜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오늘 이 일은 앉은뱅이가 성전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서 일어난 일입니다. 문론 앉은뱅이는 전에도 베드로와 요한을 만난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던져주는 돈을 받은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그들의 만남은 전에 만남과 다른 만남입니다. 무엇이 다른 가요?
베드로와 요한이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이 자기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앉은뱅이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예수의 이름을 증거 하는 만남이었습니다.

그래서 앉은뱅이에게 베드로와 요한의 발짝소리는 다른 사람의 소리와 달랐고, “우리를 보라”는 사도의 음성은 그의 귀를 통해 마음에 까지 전달되었고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사도의 음성에 이미 믿음의 확신이 생겼고, 사도의 손이 자신에 손을 잡았을 때는 이미 뭉쳤던 근육이 풀어졌습니다. 그리고 사도가 손을 잡았지만, 그는 발로 걷고 뛰면서 성전 앞으로 스스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비로서 주의 십자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은혜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앉은뱅이는 아주 특별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걸을 수 없을 때 자신을 메여 성전에까지 오게 해 준 사람, 그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을 만나 것도 어쩌면 은혜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늘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 베드로와 요한을 만난 것은 인생에 최고의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 땅에는 영적으로 앉은뱅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 들에 엎여 이교회 저 교회 다니며 성전 미문에서 이름 적고 선물만 받던 사람들, 성전에 와 있으면서 성전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지 못하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성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줘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성전 안에 은혜의 보좌를 보게 하고 피 묻은 십자가를 바라보게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 일은 사람들 가운에 자동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4절에 말씀처럼 주목해야 합니다.
6절에 말씀처럼 예수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7절에 말씀처럼 저들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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