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이 많은 사람

작성자
gfgc
작성일
2017-09-28 18:02
조회
447
괴로움이 많은 사람
막 5:25-33
2015.09.13. 강북꽃동산교회, 2017.09.24. 강북꽃동산교회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가난한 사람, 장애인, 남자 여자... 그런 것이 불행이라면, 성경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집합소라 할 수 있을 만큼 불행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38년간 중병에 걸린 사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 군대귀신 들린 사람, 간질 하는 어린이...

본문에는 12년 전에 몸에 이상에 생겨서 병원을 찾았지만 낫지 않고, 증세가 더 악화되어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며 용하다는 의사를 다 만나보았지만, 아무런 효험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 과정에서 있는 재산도 다 허비하게 되었고 지금은 아무런 치료도 못하고 손 놓고 있는 상태입니다.
성경은 이 사람의 현재 상태를 한 마디로 괴로움이 많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26절 “많은 의사에게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도 없고 도리어 더 중하다”라도 했습니다.

무슨 병인데 그렇습니까? 25절에 “혈루증”이라는 병입니다.
혈루증은 헤라어로 하이마레오 인데, 하이마와 레오의 합성어로, 피의 유출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여인은 월경 때에만 피가 나오게 되는데, 이 병은 월경과 무관하게 불규칙하게 출혈이 됩니다. 또한 어떤 상처로 계속 피가 출혈되는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어떤 여인이 12년 전부터 혈루증으로 병원을 찾았지만 낳지 않았고 이 의사 저 의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 하고 보여 주느냐 괴로움을 많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구약성서 《레위기 15장》에 혈루증은 부정한 병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만지는 것은 모두 부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런 병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자체가 어렵습니다. 문둥병자와 비슷한 처지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지금 매우 괴로운 상태입니다. 여인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은 단순한 육신의 고통이 아닙니다. 그 병으로 인한 자존심, 자존감, 우울증, 경제적 손실, 그리고 희망 상실로 오는 괴로움 등입니다.
본문 26절은 그 여인의 현재 상태를 잘 말해 줍니다.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그의 가족과 인척관계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누구하고 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앞으로도 이 여인은 외롭고 더 괴로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여인에게 희망은 없는 것입니까? 아니요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27절입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라고 했습니다.

여인에게 한날 소문이 들렸는데,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자 달라졌습니다. 그냥 예수의 관한 소문만 들었을 뿐인데 달라진 것입니다.
여인에게 희망이 생겼습니다. 삶의 의욕이 생겼습니다.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소문인데 그렇습니까? 혹시 예수님이 혈루증을 잘 고치시는 전문가라는 소문을 들은 걸까요? 아니면 예수님께 나가면 어떤 병이라도 다 고쳐 주신다는 확실한 증표를 받은 것일까요?

우리가 아는 상식에서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어떤 것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걸까요? 도대체 그가 들은 소문이 어떤 것이기에 괴로운 여인에게 생기를 주는 것입니까?
그래서 마가복음 5장까지 오면서 여인이 기뻐할 만한 예수의 소문이 무엇인지 살펴봤습니다. 혹시 예수께서 여인처럼 혈루 증을 고친 사례가 있는지 자세히 봤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혈루증을 고쳤다는 기록은 없었습니다. 다만 귀신을 쫓아내셨고,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고, 중풍병자와 나병환자를 고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인은 이것들 중에 어떤 소문을 들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우리의 추측에 예수님은 어떤 병이든지 다 고치실 수 있다는 소문이 아닐까요? 자기와 상황에 똑같은 병은 아니지만, 자기보다 더 심한 병을 고친 것을 보아 예수님은 못 고치시는 병이 없으실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을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28절에 보면 그 여인의 현재 믿음 생태를 볼 수 있는 구절 있습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12년 동안 수없이 많은 의원에게 괴로움을 받고 재산도 다 허비할 정도로 치료를 받았지만 낳지도 않았고, 지금은 병이 더 중하게 되었는데, 지금 그의 마음에 믿음이 생겼는데, 그 믿음은 예수님의 옷에 손만 대어도 낳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의 마음에 있는 이 믿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약을 쓰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옷에 손만 대어도 낳는다는 말입니까? 그렇다고 여인이 늘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니고 오늘 처음 주 앞에 처음 나와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말입니까?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며 해석하실 수 있습니까?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이 믿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성경을 보고 다시 보아도 이 여인이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27절입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라는 구절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고 구원의 시작입니다. 천국에 가는 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소문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있었던 방언의 은사는 소문사역의 시작입니다. 한국교회 초대 때에 예수 믿은 사람 말 잘한다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를 잘 믿고 성령 충만하면 말 잘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이용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말하고 예수를 말하게 하셨습니다.

예수의 소문은 곧 복음입니다. 복음은 그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가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의 주체는 예수님 이십니다. 그럼으로 예수라는 말 자체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기에 넉넉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을 듣는 것은 은혜입니다. 예수라는 말은 듣는 것은 이 땅에 듣는 최고의 은혜입니다. 예수시라는 말을 듣는 것 만 가지고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소리만 들어도 하나님께 나올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이라고 했고 마가복음 2: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고 했고, 마가복음 7: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 엎드리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 앞에 나온 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 귀에 예수의 소문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구원받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먼저 예수의 소문을 내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기대하십니다.
우리가 은혜 받은 일로 예수의 소문을 내시기 바랍니다. 구원받고 축복받은 일로 예수의 소문을 내시기 바랍니다. 소문을 내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주께로 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여인은 예수님이 계시는 현장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원래 혈루증을 앓고 있는 사람은 이런 장소에 나오면 안 됩니다. 그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고 있었다면 이런 장소에 나올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없습니다. 이유는 이런 경우 대부분 심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인은 나왔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예수님께로 왔을 때 예상했던 대로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현장은 늘 그랬듯이 오늘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예수님께 가까이 나가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가까이 나가 옷을 만지는 것은 못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주님께 특별한 안수기도를 받는 것도 아니라면, 지금 현재 그의 뜨거움 마음은 넉넉히 예수님의 옷을 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가지고 무리들 속을 파고들어 갔습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예수님 가까이 까지 접근하여 예수님 옷자락을 만지는데 성공했습니다. 너무 덜려서 아주 살짝 만졌습니다. 이를 눈치 챌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음에 두근거림과 동시에 평안과 희열과 함께 몸이 짜릿한 이 기분은 무엇이죠? 비교도 안 될 일이지만, 소녀 팬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못을 만진 것과도 비교도 안 되는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인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몸에 혈루의 근원이 말랐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29절) 놀랍게도 병이 나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본인은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안수 기도를 하신 것이나 선포하신 것도 아니고 그리고 예수님이 여인을 만진 것도 아니고, 여인이 예수님을 만진 것인데, 그것도 예수님이 알 수 없도록 옷에 살짝 손을 댄 것뿐인데 병이 나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가 중요한 과제 하나를 발견했습니다.이제 병을 고침을 받은 이 여인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것입니다. 자기의 믿음대로 혼자 나와서 몰래 예수님의 옷을 만지고 고침을 받았으니 그냥 아무도 모르게 집으로 가야 하느냐, 아니면 예수님께 나와서 고침 받은 경위를 이야기해야 되는 건지, 판단을 해야 할 기로에 있습니다. 여러분 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말입니다. 솔직히 예수님께 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감사와 사례 할 필요가 있느냐 말입니다.
그때 여인은 나름대로 이런 판단을 했습니다. 이 일은 참으로 좋은 일이고, 행복한 일이지만, 아무도 모르게 고침도 받았고 예수님이 나에게 수고하신 것이 없기 때문에 그냥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뒤로 물러나 중 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님께서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더니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여인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마치 도적질해서 도망가다가 들킬 기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제자들이 나서서 막아 주었습니다. “선생님 무리가 이렇게 에워싸는 것을 보시면서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말씀하십니까?”
그런데도 주님은 물러서지 않으시고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누가 내게 손을 댓다. 그래서 내게서 능력이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때 너무도 놀란 여자는 부들부들 떨면서 예수님 앞에 와서 엎드려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주여 제가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중 여러 의원에게 괴로움을 받고 있는 재산도 다 허비하고 몸은 더 망가지고 있을 때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순간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겨 정말 나와서 예수님의 못을 만졌는데 몸이 나았습니다. 예수님 허락도 없이 옷을 만져서 죄송합니다.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중요한 것은 이런 여인에게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실 까요? 예수님은 자신에 옷에 손을 댄 여자를 왜 찾으신 것일까요?

33절에서 이유를 찾았습니다.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라고 했습니다.
여자는 자신에게 있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병이 치료되어서 기쁘기 보다는 왠지 두렵고 죄를 지은 것 같고 도적질을 한 것 같은 것은 무엇일까?
12년 동안 앓았던 병을 치유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두려운 것입니까? 이유는 딱하나 예수님을 몰래 만졌다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도적질 했다는 느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치료 받고도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 그 여인이 예수님 몰래 옷을 만져 무엇인가 도적질을 한 것입니까? 무엇인가는 치유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치유도 도적질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믿음도 구원도 도적질 할 수 있겠네요? 예수님과는 관계없이 내가 만지고 싶은 대로 만지면, 그것이 내게 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병 고치는 것이 그렇다면 믿음이 그렇고 구원도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오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 그냥 간다면 이런 오해는 얼마든지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주님이 여인을 꼭 만나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은혜이나 믿음이나 치유, 구원 천국은 내가 만져서 오는 것이 아니고, 그 주체이신 하나님이 주셔야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주는 이가 없는데 받는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에게서 능력이 나갔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정확히 말하면 주님은 여인이 자기에게 가까이 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고 여인이 손을 댓을 때 치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즉, “네가 나를 만질 때 내가 너를 치유를 했다”는 뜻입니다.
그럼으로 여인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한 더 이상 예수님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은 믿음이나, 구원이나, 치유나, 축복이나 내가 같고 싶다고 갖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두가 선물이기 때문에 줄 분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만져서 치유를 한 것이 아니라, 여인이 주님을 만질 때 주님이 그에게 치유를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여인을 찾으신 또 한 가지 이유는 34절에 찾았습니다.34절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여인에게 선포하는 내용에 관심을 갖아야 합니다. 주님은 여인에게 두 가지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는 구원이고 하나는 병에서 건강해지는 선포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지만, 그 병자 모두에게 구원을 선포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누가복음 17:12-19입니다. 예수께서 한 마을로 들어가실 때 문둥병자 10명이 멀리서 예수가 지난가심을 듣고 큰 소리 불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이 말은 너희 몸이 낳았으니 제사장에게 보이고 문둥병자가 아닌 것을 제사장으로부터 증명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10명의 문둥병자들이 가는 중이 온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10명 모두가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고 문둥병이 다 낳았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열 명 모두가 놀라운 치료를 받은 것입니다. 이제 그들 모두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도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 모두가 주님께 먼저 오기를 바라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먼저 돌아온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고침 받고 먼저 주님께 온 그에게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눅 17:17-19) “[17]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리고 아주 중요한 선포를 하셨습니다. 19절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바로 여기에 고침 받은 사람이 주님을 다시 먼저 만나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고침 받고 몰래 집으로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구원의 은혜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은 치유와 함께 구원을 주시기를 즐겨 하셨습니다. 그러나 치유를 해 주셨다고 다 구원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치유를 받은 후 주님의 당부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들에게 구원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치유 후주로 이런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네게 있었던 일을 말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등”입니다.

만일 주님이 여인을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 여인이 그냥 집으로 간다면 여인에게 구원의 은총이 있었을 까요? 또한 그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 할 수 있을까요? 아주 이상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다음부터는 예수님께 나오지 않아도 되고 예수님의 사진이나 동상을 앞에 두고 만진다든가 절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오늘에도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어느 특별한 기도원에서 나오는 물을 먹어야 병이 낫고, 누가 어디에 손을 대고 기도해야 낳고, 병을 고침 받으려면 어느 기도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분문에 나오는 여자는 괴로움이 많은 여자입니다. 12년 전에 생긴 혈루병은 그의 인생의 행복을 괴로움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꽃처럼 아름다워야 할 그의 인생을 부정한 인생이 되게 했습니다. 그가 만지는 모든 것도 부정하다하여 그는 부정을 만드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여러 의사들에게 자신의 치부를 이야기 하는 것은 죽을 마치 괴운을 일이였습니다. 다음 의사를 고칠 것으로 알고 이렇게 저렇게 갖다 준 돈은 인생을 거지가 되게 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이 여인은 살았으나 죽은 자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자존심, 존엄성에 큰 상처가 난지 오래입니다. 동네에 퍼져있는 자기에 대한 소문 때문에 밖이 싫어졌고 사람이 두려워 졌습니다. 한 마디로 이 사람이 새로워 질 가능성은 현재로서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그의 귀에 들인 예수의 소문은 그에게 용기를 주었고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날 수 있다.’는 믿음까지 주었습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와 옷에 살짝 손을 대었는데 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병이 나아서 행복해야 하는데 두려움이 먼저 찾아 왔습니다. 그때 주님이 그를 불러 세워서 두려움을 없애 주시고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들음의 종교입니다. 또한 말의 종교이자 소문의 종요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했듯이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 있는 예수의 이름을 소문에 싫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의 이름을 말하는 자가 없이는 듣는 자도 없고 듣는 자가 없으니 믿음도 없고 믿음이 없기에 구원의 역사도 없다는 것이 바울이 주는 진리의 말입니다.(롬 10:14)

성도 여러분! 이 땅은 성령의 능력이 있는 예수의 이름이 필요합니다.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그 이름으로 말하면 사람이 감동하고, 그 이음으로 말하면 귀신도 물러가고 그 이름으로 말하면 병자고 고침 받는 그런 능력 있는 이름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그 이름의 능력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소문이 퍼져 나갈 때 병자가 오고 죄인들이 오고 문제 있는 사람들이 와서 치료받고 해결 받는 우리의 교회와 삶의 현장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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