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이름

작성자
gfgc
작성일
2016-06-14 11:38
조회
630
예수의 이름
사도행전 4장 13-21
2016.05.22. 주일오전예배

요즘 우리사회에 가장 문제다 되고 있는 것은 묻지마 살인입니다.
지난 5월 17일 강남역 인근 건물 화장실에서 23세 여성이 생면부지 남성의 흉기에 찔려 숨진 사건은 우리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오늘 우리 교인들에게 더 충격을 주는 것은 이 시건 역시 교회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문과 모 방송사에서 이 사람의 신상을 공개 했는데, 그는 목회자를 꿈꾸는 모신학원을 졸업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 사회는 왜 이렇게 점점 혼란해 지는 것입니까? 그리고 크고 작은 사건이 있을 때마다 믿는 사람들은 늘 연루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되면 앞으로 교회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전도할 어떻게 수 있습니까?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시간이 가면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입니까?

사실 시대마다 교회와 성도들이 사회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때는 없었습니다. 어느 때는 크고 작은  사회 일에 기독교는 늘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때가 되면 교회와 성도들은 그 사건에서 늘 옳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독립운동이 아니겠습니까? 대표적인 사람들은 김구, 조만식, 남궁억, 손양원, 주기철, 류관순, 안이숙 이런 분들 아닙니까?

그런 분들은 당당하게 예수의 이름을 내걸고, 자신의 행동이 곧 하나님 영광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거리고 나갔고 진리를 말했습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비난과 고문 그리고 죽임을 당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믿는 것을 숨기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느새 사회적 분위기는 예수를 말하면 안 되게 되어 있고, 예수에 대해서 너무 강조하면 법적인 처벌을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와 요한이 사회적으로 무리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밤에 유대 관리들에게 잡혀 갔습니다.
날이 밝자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앞으로 끌려갔고, 공회에는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봐와, 알렉산더와, 및 대 제사장의 문중이 다 모여 이들을 신문했습니다.

그때 그들이 신문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그들이 며 칠전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고쳐준 그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평생 걸어보지도 못한 앉은뱅이를 고쳐준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그것이 공회 앞에 끌려갈 만한 잘못된 일입니까?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다음은 당시 공회에서 대제사장이 베드로와 요한을 신문하는 과정입니다. 어디서 잘 못됐는지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7절입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때 베드로와 요한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습니다.
10절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이 섰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공회가 발칵 뒤집어 졌습니다. 이들을 신문하는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놀란 것입니까?
놀란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한 가지는 베드로와 요한이 하는 말 때문입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
이런 말입니다. 7절에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말과,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다.”는 말 때문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고 한마디로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이 원래 학문 없는 범인인줄 알았다”(13)

저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는 과정에도 놀라는 또 한 가지는 14절입니다. “병 나은 사람, 즉 앉은뱅이 되었던 사람이 지금 온전해 저서 저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더 이상 공회에 세워둘 수 없었습니다. 그가 무슨 말을 더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공회 밖으로 끌고 나가게 하고 공회 의원들 끼리 서로 의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논의된 결과를 베드로와 요한을 따로 불러 이야기 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그 논의 된 결과에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17~18절입니다. “이것이 민간에서 어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게 말라. 그들을 불러 경고하고 도무지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고 말고 가르치도 말라”
무슨 말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 이름을 말하지 말라”입니다.

1. 예수의 이름

여러분!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예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예수의 이름에 도전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생겼습니다. 즉, 예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면 다른 종교를 차별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는 법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이름을 전혀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해도 되고 예수의 이름으로 병을 고쳐도 되고, 예수의 이음으로 전도를 해도 문제는 없습니다. 단 예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만 안하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일 세상이 변해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해서도 안 된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공적인 기도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다가 적발되면 고발을 당하고 벌금을 문다면 여러분은 그래도 기도를 하시겠습니까?
시대마다 차이가 있지만, 결국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정사와 권세 속에 있는 사단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왜 언제부터 예수의 이름 앞에 이렇게 소동을 하는 것입니까? 못 부르고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구약시대에는 예수의 이름 앞에 소동한 적은 없습니다.예수의 이름 때문에 소동이 일어 난 것은  정확하게 예수님이 세상에 탄생하셨을 때 부터였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했다는 소식은 예루살렘과 헤롯왕 궁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소동은 예수님이 애굽으로 가시므로 잠잠해 지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공적으로 활동하시므로 예수이름으로 인한 소동은 다시 있었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구름떼와 같이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 이름 앞에 병든 자가 치료 받았습니다. 귀신이 물러갔습니다. 인생의 문제가 해결 됐습니다. 영혼의 문제가 해결 됐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소동이 일어 난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다음입니다. 정확하게는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지 않을 때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지도 않는데 예수이름으로 인한 소동이 크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반듯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기도를 할 때는 한마디의 기도를 하더라도 반드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를 합니다.
아무리 유창하고 장황하게 했더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닌 것인데 왜 그러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의 이름으로만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빌립보서에 그 이유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되 예수님 이름을 통한 기도만 받으시도록 제도를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보좌를 다 버리시고 세상에 내려오신 것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공로로 그런 제도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람들이 아무리 유창한 기도를 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실제로 신학생 시절 기도를 하는데 예수님 이르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통일교인들입니다. 그들은 기도를 한때 문선명의 이름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기도에 관련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정확하게는 병을 고치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고쳤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고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 지도자 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 뿐만아니라, 병을 고치는 일, 가르치는 일도 예수의 이름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병을 고치는 일, 가르치는 일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된다면 우리가 말하고 봉사하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전도는 어떤 형태로든지 예수의 이름이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한마디 기도를 한 때도 예수의 이름으로 한다면 열 마디 수무마디 말을 하면서 예수 이름을 뺄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우리의 기도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면 기도가 아닌 것처럼,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전도도 전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기도할 때만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는 아주 철저하게 예수님 이름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전도나 봉사를 할 때는 내 이름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도하는 사람들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부흥은 예수이름으로 전도할 때 있었습니다.

한국 초대교회에 최권능 목사(본명 : 최봉석, 1869-1944)님이 계셨습니다.
그의 전도 맨트는 우리들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죄 가운데 살다가 죽으면 지옥 갑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믿고 구원 얻으라고 십자가에서 당신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예수 믿어야 삽니다. 예수를 믿고 복을 받으시오.”
“예수천당 불신 지옥”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예수 믿으려도 당신같이 될까 봐 무서워 못 믿겠소.”
“에잇 퉤!” 그를 향해 침을 뱉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행색이 얼핏 보아서는 거지와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비단 불신자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노회 안에서도 최권능 목사와 그의 전도 방법에 대한 비방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서슴지 않고 미쳤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서울에 있는 조선 총독부를 향해, 압록강을 건너서 만주 벌판을 향해, 현해탄을 건너서 아시아 천지를 마음대로 먹어 치우려고 이빨을 갈고 있는 군국주의 일본을 향해 뻗어나갔고, 불의한 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억눌린 자의 심령을 위로하는 울림이었습니다.
문론 그는 독립운동가는 아니었습니다. 정치인도 아니었었습니다. 위대한 신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외침은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쳤던 외침으로 그 땅에 새로운 빛을 보게 한 것처럼 그의 외침은 어둠에 놓인 이 땅을 밝히는 빛이었습니다.그의 외침은 개화를 타고 밀어닥치는 도덕적 부패를 막아내는 성령의 방패였습니다. 덮쳐오는 마귀의 해일을 향해 외치는 거룩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렇게 외침으로 그가 세운 교회 수가 80여 개,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이들이 수천, 수만에 달하니 그는 진정한 예수이름의 증거자 였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따로 불러 위협합니다. 그리고 엄히 경고하며 말합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예수 이름에 얼마나 능력이 많으면 부르지도 말라는 것입니까?
성도 여러분! 예수이름에 능력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 능력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예수이름을 많이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승리하게 되고 열매가 있게 됩니다.

 그날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무서운 협박과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우리를 더 무섭게 하고 있습니다.
20절입니다. “우리는 보고 들을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도다.”

 이 말은 예수의 이름을 계속 말하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베드로와 요한이 이런 식으로 나가면 하나님께 영광을 가릴 수 있고, 전도의 문이 막힐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가서 모든 믿는 사람들이 핍박을 받을 수 있고 또 당신들도 다시 잡혀와 어려움을 당 할 수 있을 턴데, “말하지 아니할 수 없도다.”는 무슨 어긋장 입니까?그러나 이것은 다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오늘 교회가 이때와 같은 점이 있습니다. 예수를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말하면 불이익을 당할 것 같고, 예수를 말하면 사회적 비난을 함께 당하게 될까봐 숨기고, 예수를 믿는 것 자체를 숨기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스개말로 유홍점에 가서 뒤에서 “집사님” 하고 부르면 반 이상이 뒤 돌아 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이름을 빼고 기도하고, 빼고 병을 고치고, 빼고 전도를 하면 갑자기 병자가 안 일어나고 전도가 안 되는 것입니까? 하지 말라면 안하면 될턴데 굿이 “말하지 아니할 수 없도다”는 무슨 말입니까?

 여기에 중요하고 분명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이든지 전도이든지 봉사이든지 가르치는 것이든지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내가 한 것이 되고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는 말씀은 예수님 이름으로 하라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요즘처럼 사회적으로 어려운 시대에 예수의 이름을 말하면 사회적으로 교회가 당하는 비난을 함께 받아야 하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을 말하기는커녕 믿는 표시도 안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그 기도가 그 전도가 그 봉사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예수의 이름을 말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사람들의 헌신을 하늘로 올리는 제도입니다.

 문제는 이 땅에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분위기와 제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와 제도는 어느 시대나 때에도 다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느 시대에든지 있는 것은 엡 6장에 기록된 대로 정사와 권세를 잡고 있는 존재가 악한 영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은 예수 이름의 능력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결론은 예수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환경과 제도에서 예수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위협과 경고를 받으면서 그들은 계속 예수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8절입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원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자 예수를 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예수의 이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말하면 능력을 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에 능력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이름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에 능력이 있는 것은 예수의 이름에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과 예수님은 한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예수이름을 말하게 하고, 예수이름은 성령의 능력을 동반합니다. 오늘처럼 어둡고 학한 시대에 시대를 변화 시킬 수 있는 최선은 오직 예수, 성령충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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