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지기는 힘

작성자
gfgc
작성일
2017-12-01 16:22
조회
253
두려움을 이기는 힘

사도행전 23장 12~16절

2017.06.25. 강북꽃동산교회 주일오전

요즘 우리는 개혁이라는 단어를 쉽게 접하게 됩니다. “정치개혁”, “경제개혁” “검찰개혁” “종교개혁” 등. 그런데 이미 느끼고 게시겠지만, 개혁은 좋은 것인데, 개혁을 하려면 기득권과의 부득이한 싸움을 해야 한다는 점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영웅이 될 수 있겠지만, 누군가는 희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은 좋지만 쉽지는 않은 것입니다.

올해가 기독교 종교개혁 5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나라는 문론 세계기독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다채로운 행사들을 중비하고 있습니다.

500년 전 즉,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부패한 로마 카톨릭을 향해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성당문에 뭍이면서 종교개혁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됐습니다. 이 95개조항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1500년 당시 레오 교황이나 카톨릭 신부들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인간의 행위 공적”이라고 믿고 가르쳤습니다.

1510년 루터는 로마를 방문했다가 빌라도 계단 주변에서 어이없는 일을 목격했습니다. 참회자들이 빌라도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그 계단에 입을 맞추며 고행을 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그 모습과 수도사들의 무식과 무질서를 보면서 속이 터지는 가슴을 끌어 않았습니다. 문론 자신도 무의식중에 빌라도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입을 맞추는 고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다가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서 자신도 모르게 큰 한 쉼을 쉬며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 주여 당신의 은혜로만...” 이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개혁의 칼을 뽑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개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기 때문에 많은 위협과 두려움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유명한 일화입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부인이 상복을 입고 슬프게 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루터가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누가 죽기라도 했소? 왜 그러고 있소” 그러자 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셨어요!” 루터가 “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어찌 하나님이 돌아가실 수 있단 말이요.”라고 하자, 부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찌 주의 종인 당신의 얼굴이 그리 근심과 수심이 가득하고 어두울 수가 있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루터는 자신을 돌아보고 그 후에 종교개혁이라는 큰일을 이루어 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어디에나 두려움이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고 환경일 수도 있고, 삶 자체일 수도 있고 영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요소가 많은 때인 것 같습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우리를 위협하는 요소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전철이나 버스를 타면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강도이며 도둑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를 위협하는 새로운 존재가 생겼는데, 여러분들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개”입니다. 이 개가 지나가는 사람을 물어 죽입니다. 어떤 개는 농장을 뚤고 들어가 오리, 닭을 무차별 물어 죽입니다. 심지어 250kg이나 넘는 소도 물어 죽입니다.

바울이 지금 죽음의 위협 속에 있습니다. 바울을 죽이려는 자들은 동족 유대인입니다. 이들은 전에 바울을 유대의 최고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 하고 그가 하는 일에 전폭 지지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바울을 죽이지 않고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맹세를 한 사람이 벌써 40명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바울이 왜 이런 위협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즉, 율법이 아닌, 행위와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인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다는 사실을 선택하고 그것을 전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위에서 개혁을 말했는데, 그가 신앙개혁, 종교개혁을 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바울이 신앙개혁을 한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바울은 그동안 율법과 공로를 중요시 했습니다. 신앙의 가문에서 엄한 율법교육을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고 나서 이렇게 개혁했습니다. (롬 1:16, 개정)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 ” 그래서 자신의 가문 학문 자랑거리는 모두 배설물처럼 처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령이 보내시는 곳에 가서 그가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주인이든, 종이든 노예든 만나는 대로 예수를 증거 했습니다.

오늘 바울이 당하는 죽음의 위협이 바로 이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나 교회에 데리고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흑인을 교회에 데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헬라인을 교회로 데리고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울을 죽이려는 자들에게 교회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죄인은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선민 유대이만 들어와야 하는데 바울은 이방인들을 교회에 들어오게 해서 성경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주장처럼 오늘 저나 여러분도 이 교회에 함부로 들어오면 안됐습니다.

(행 21:28, 개정)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바울)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성전)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일에 대해서 재판을 받는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재판 중에도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23장 6절 아니겠습니까? 내용을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성전을 더렵혔다고 심문하고 있는데, 사실 제가 이곳에서 심문을 받는 것은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심문을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 바울의 이 한마디가 재판장을 발깍 뒤집은 것 아십니까? 10절에 “큰 분쟁이 생기니”라고 했는데, 재판장은 바울을 신문하다가 두 패로 나눠져 싸우고 있습니다. 7~8절 때문입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이 부활의 문제로 다투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천부장이 데리고 갔습니다. 10절에 보니까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나라.”

지금 이런 상황에서 40명의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겠다고 맹세를 한 것입 니다.

오늘 본문을 좀 더 자세히 보면 바울은 아주 곤란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바울을 죽이겠다고 동맹한 40여명의 사람들이 유대인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찾아와서 “우리 40명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겠습니다.”라고 맹세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을 죽이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말했습니다. 15절입니다. “너희는 그(바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불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성경에는 40여명의 사람들에게 대해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은 무력봉기를 준비하는 민족주의자들이거나 열심당원일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눈에는 이방인과 협력하는 바울을 민족의 반역자로 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지 때문에 그들이 바울을 죽이는 일은 당연한 일이고 나라를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바울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바울은 이런 외부의 사정을 알고 있는 건가요? 또한 그의 개인적 심경은 어떠할까요? 어마나 두려울까요? 천부장에 영내에 갇혀있는 바울은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 할 수 있을까요? 지금 로마의 천부장이 바울의 신변을 확보하고 있지만, 그가 바울을 어느 정도로 보호해 줄 수 있을까요? 천부장이 생각해도 바울은 밖에 나가는 순간 죽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을 죽이려는 자들은 동족 유대인들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고 전한다는 이유로 저들에게 고초를 당하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 어떻게 되는 건가요? 하나님은 이 상황을 보고만 계시는 건가요? 여러분은 어떻게 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바울이 이곳에서 살아 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나요?

우리는 오늘 이 말씀에서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 받고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바울에게 한 사람이 급히 왔습니다. 그리고 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소식은 다름 아닌 “40여명의 민족주의자들이 바울, 당신을 죽이려고 매복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행 23:16, 개정)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소식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바울이 죽음의 위기에 있을 때, 바울에게 전해진 바울을 죽이려는 40명의 사람들이 매복하고 있다는 소식 말입니다. 이 소식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 소식은 좋은 소식일까요? 나쁜 소식일까요?

저는 이 소식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문론 이 소식을 가지고 온 사람은 바울의 생질(친척)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만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믿어집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달한 바울의 생질은 하나님이 운영하시는 천사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천부장에 영내 있어 외부의 상황(자기를 죽이려는 음모)을 잘 모를 때 천사를 통해 알려 줌으로 바울이 다음에 어떤 판단을 해야 할지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그렇게 볼 때 이 소식은 바울에게 기쁜 소식,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문론 외형적으로 보면 이 소식은 분명히 나쁜 소식입니다. 또한 두려운 소식이고, 죽음의 소식입니다. 그리고 들으면 더 두려울 수밖에 없는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은 이 소식은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질 천사를 통해서 직접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와 같은 예를 잘 소개한 말씀은 누가복은 125절 이하입니다.(찾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메시야를 세상에 보내신다는 소식을 천사를 통해 처녀 마리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그때 그 소식은 마리아에게 무섭고 두렵고 황당한 소식이었습니다. 이유는 유대사회에서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면 돌에 맞아 죽은 엄청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무섭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천사는 “놀라지 말라,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천사가 가지고 마리아에게 가지고 온 소식 두려운 소식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은 이 소식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마리아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받아 드리면 기뻐할 수 있게 되나요?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두 번째로 받고 적용해야할 말씀입니다.

마리아에게 전달된 “예수가 탄생 하신다”는 소식은 분명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기쁜 소식으로 받아드리기에는 아직 힘든 말씀입니다. 이유는 자신에게 잉태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간음죄로 돌아 맞아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바울에게 들려진 “40명의 자객이 숨어 있다”는 소식도 기쁜 소식인 것은 바울을 죽이려는 자들의 음모가 들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소식이 아직 저에게 기쁜 소식으로 와 닫지 않은 것은 단면적으로만 보면 그에게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마이라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마리아나 바울이나 오늘 우리들이 이런 기쁜 소식을 복음의 소식(기쁨의 소식)으로 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누가복음 1장 32절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눅 1:32-33, 개정)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이는 이미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인데 천사가 한 번 더 강조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마리아가 이 말에 변화를 받았습니다. 37절입니다. (눅 1:37, 개정)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아멘

이게 무엇입니까?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 포인트입니다. 즉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의 모든 두려움을 물리친다는 사실입니다. 즉, 천사의 말도 아니고 목사의 말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마리아나 바울에게 전달된 소식은 분명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천사의 말입니다.

성경에는 사탄의 말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이 (마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 말이 하나님의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때 마리아는 놀랍게 달라졌습니다. 두려움을 한방에 날려 버렸습니다. 우리는 마리가가 두려움을 한방에 날려버린 마음 상대를 누가복음 1장 46~56절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합니다. 기뻐하는 것은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습니다. 이제 후로 나를 복이 있는 자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비천한자를 높이셨습니다. 등”

이제 본문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사도행전 23장입니다. 바울도 마리아처럼 기뻐할 말씀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생질을 통해서 주시는 너를 죽이려는 40명이 기다린다는 말씀을 아직 사람의 말이 아닌가요? 아직은 천사의 말이 아닐까요? 바울이 이 말에서 어떻게 기쁨을 찾을 수 있을까요?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바울이 마리아만큼 두려움을 한방에 날려 보내는 말씀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찾으신 분계십니까?

11절입니다. (행 23:11, 개정)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놀랍게도 바울은 하나님이 보낸 생질, 천사를 만나기 전에 먼저 주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천부장의 연내에서 두려워 떨고 어쩌면 순교를 각오하고 있을 때, 그리고 밖에서는 바울을 죽이려는 40명의 열성분자들이 맹세를 하고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주님은 바울이 있는 누추한 곳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울아! 담대하라.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다음에는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할 것이다.”

이 말씀을 무슨 뜻입니까?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고난 중에도 복음을 전한 것은 잘한 것이고 다음에는 로마에 가서 그렇게 전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해석해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는 죽지 않는다는 말이고 곧 로마로 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생질을 만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유는 바울에게 들려진 세상 말이 기쁨이 되느냐 위협이 되느냐의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바울이 먼저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에게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생질이 전해준 죽음의 소식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러나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바울은지지 얼마나 신나고 기쁠까요? 저들이 40명 아니라 400명 4천명이 자기를 죽이려 삿삿이 포위를 한다 하더라도 바울이 두렵지 않는 것은 바울은 하나님을 만났는데, 그 하나님께서 다음은 로마로 간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적용 ->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매일 들려지는 소식은 두려움의 소식입니다. 전쟁과 기근에 대한 소식입니다. 죽고 죽이는 소식입니다. 위협과 협박의 소식입니다. 망한다는 소식, 안 된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들려지는 소식 가운데 어쩌면 복음의 소식이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위기는 곧 기회다.”라고 표현을 합니다마는 우리는 그것에 하나님의 복음적인 소식이 많이 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귀에 들릴 때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두려움이 된다는 사실이지요?

예를 들어 처녀가 예수를 잉태한다는 천사의 소식은 마리아에만 두려움이 될 수 있습니다. 40명의 자객이 기다란다는 생질의 소식은 바울에게만 두려움이 도리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누구든지 사람만 보고 환경만 보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미리 들어야 합니다. 못 들었으면 찾아야 합니다.

우리 집사는 예배 끝나고 집에 가면 긴장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부산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오기 때문입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했습니까? 30년 만에 신안생황을 하시는데 대충하시지 얼마나 열심히 하시는지, 예배 끝나고 나면 꼭 전화하셔서 질문을 하십니다. “호산나가 무슨 뜻이니, 종려나무가 무엇을 상징하니, 다윗이 숨어 있는 굴에 사울이 들어와서 잠이 들었는데 그 굴 이름이 무엇이니, 다윗은 그 굴에서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왜 안 죽였니 등 등” 보통이 리런 질문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어머니께 물었습니다. 이거 교회에서 숙제내준 것이냐고 말입니다. 아니랍니다. 그냥 설교 듣고 풀어 보신다는 것입니다.

결단 ->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과 의도는 결코 저와 여러분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지 않습니다. 이유는 세상에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거나 주의 종들을 통해서 전해 주는 말은 세상에서 흔히 듣는 목소리와 세상에 현상들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미리 읽었거나 배웠거나 전에 들었던 말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때 있으면 그때그때 마다 들려지는 소리는 우리에게 있는 두려움을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벌써 일 년에 반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농부들은 씨를 부리고 벼를 심기 원하지만 비가오지 않아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행이 성경은 지금은 은혜의 때이고 구원의 날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말씀 농사를 잘 잣고 계십니까?

우리가 말씀농사를 잘 이어야 하는 것은 (엡 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입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들을 물리치기 위합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주시고 개혁자들을 보내주신 것 감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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