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파의 사명

작성자
gfgc
작성일
2016-05-08 16:32
조회
472
산파의 사명


출 1: 15~22

 2016.05.1. 강북꽃동산교회 주일오전

어떤 왕이 왕궁을 지을 때, 모든 벽을 수백 개의 거울로 장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개 한 마리가 길을 잘못 들어 그 궁전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거울로 된 궁전에 들어간 개는 자기를 향하여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수 백 마리의 개를 보고 놀라서 짖어 댔습니다. 그러자 거울 속에 있는 수 백 마리의개도 함께 짖어 댔습니다. 놀란 개는 이번에는 공격할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러자 거울 속에 수백마리개도 동시에 공격할 자세를 취했습니다. 두려움을 느낀 개는 거울 속에 비춰진 개를 향해 마구 공격을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개는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두려움이 주는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두려움이란! 실체가 없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은 존재하고 그 결과는 매우 치명적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의 수보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죽은 사람의 수가 훨씬 많고, 질병으로 죽은 사람보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죽은 사람이 더 많다.”

우리가 잘 아는 나폴레옹 힐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두려움은 모든 논리를 무력하게 하고, 모든 상상력을 파괴하고, 모든 자신감을 꺾어버리고, 모든 열정을 지워버리고, 모든 의욕을 없애버리고, 사람들을 나태와 비참과 불행에 빠뜨리고 만다.”

성경은 두려움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두려움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큽니다. 실제로 사람의 질병의 70%이상이 마음에서 생기는데, 그 주요 원인이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상하면 몸도 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건강의 비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셉을 따라서 애굽으로 내려갈 때, 그 인원은 불과 70명이 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나이 많아 죽을 때쯤 되었을 때는 이스라엘은 인구는 약 200만 쯤 되었습니다. 대단한 번성이죠?

이스라엘이 번성하는 것에 대해 가장 두려움을 사람은 바로왕 이였습니다. 그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10절입니다. “자, 우리가 그들에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이렇게 생각한 바로왕은 애굽의 산파(십브라, 부아)를 불러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6절입니다. “너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하산을 도울 때,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는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슨 힘을 믿고 왕의명령을 거역했을까요? 지금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산파들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생명을 살리는 것이 산파의 사명이고 원칙대로 생명을 살렸는데, 그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1. 산파들의 두려움

남자 아이이거는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산파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만 남자아이를 살리고 말았습니다. 아이를 살리는 것은 산파의 본능이자 사명입니다. 그런데 당시 최고 권력자 왕이 산파들을 특별히 불러서 살리지 말고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살렸습니다.
그런데 산파들은 윤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옳은 일을 했습니다. 정상적인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떨리고 두려운 것입니까? 정상적인 일을 했는데 두려움이 오는 것입니까?

왕이 말한 것 때문입니다. 왕이 그들에게 비정상적인 것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왕이 산파들에게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왕이 산파들을 두렵게 했습니다. 당시 바로왕은 두려움을 주는 왕이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묵상해 보니 두려움의 시작은 왕에게서 부터였습니다.

10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 우리가 그들에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두려움은 왕에게 먼저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두려움의 근원은 사탄 마귀이고, 마귀는 그 두려움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두려움은 전염병처럼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소문에 소문을 타고 온 지구 구석구석까지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게 이런 두려움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두려움, 정치적인 두려움, 전쟁의 두려움, 질병의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우리 믿는 사람들까지 막 흔들리고 넘어지고 있습니다.

산파들의 두려움은 어디서 왔습니까? 애굽 왕에게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산파들은 그 두려움을 이겼습니다. 어떻게 이겼습니까? 무엇이 그들에게 두려움을 이기는 힘을 주었습니까?
17절에서 우리는 그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이를 살린지라.”고 했습니다. 산파들이 왕의 명령을 어기고 그 두려움의 공포에서 승리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왕도 두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은 왕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까? 네.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는 빛과 어두움에서 얻는 진리입니다.  어두움이 두려움을 주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빛이 나타나면 곧 물러가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바로왕의 주는 어두움은 어두움이 주는 두려움과 같습니다. 그 두려움이 산파들을 무섭게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산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하나님의 두려움을 보았습니다. 그 두려움은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은 산파들에게 있는 어두움의 두려움을 물리치기에 충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불합리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정의를 말하면 두려움을 당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짓을 말하라고 강요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진실하면 바보같이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을 하면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면 융통성이 없는 사람으로 매도합니다.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진리를 지키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마음이 편하지 않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가 이 사명을 감당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빛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빛의 자녀에게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놀라운 힘이 나오는 줄 믿습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그 힘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힘입니다.”

그 힘은 하나님을 바라 볼 때 나오는 힘입니다. 세상에 하찮은 풀의 생명도 해를 바라보면 힘을 얻어 시멘트를 뚫고 나옵니다. 흙암 속에서는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산파들이 왕의 부름을 받아 궁궐에 들어가고 왕의 말을 들었을 때는 두려움이 가득했지만, 왕궁에서 나와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하나님의 두려움에 압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두려움이 왕에게서 들어온 두려움을 물리쳤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에 그 무엇도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118:6)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환경도 질병도 사단도 그 무엇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롬8:31).

소년 다윗이 골리앗의 창과 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 있게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대일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믿음을 지킬 수 있고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2. 산파의 지혜

왕은 분명히 산파들에게 히브리 사람에게 남자가 나오면 죽이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히브리 사람들 가운데 남자아이들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왕이 다시 산파들을 왕궁으로 불러 드렸습니다. 왕이 산파들을 왕궁으로 불려 드린 것은 히브리 사람 속에 자라고 있는 남자아이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를 묻고 산파들에게 그 책임을 물고 산파들을 죽이려는 속셈입니다.
산파들이 불려 들어간 곳이 어디 입니까? 왕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곳입니다. 산파들이 불려 들어간 왕궁은 두려움이 시작된 곳입니다. 이제 산파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산파들이 두려움이 있는 왕궁으로 불려 들어갔기 때문에 산파들에게 다시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까? 두려움의 주범인 왕은 산파들을 보자 대뜸 대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18절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를 살렸느냐?”  그때 산파가 다음과 같은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산파들의 이런 말에 너무 놀랐습니다.
산파들의 대답은 19절입니다.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여러분! 이게 산파가 왕에게 대답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믿어도 되는 말입니까? 여러분이 왕이라면 이 여인의 대답을 그대로 믿으시겠습니까? 지금 산파들이 왕 앞에서 장난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 여인들이 진실을 말한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히브리 여인들은 애굽여인 같지 않아 산파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아이를 낳아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그게 아니잖습니까? 아이를 살려주고 변명하는 것이 아닙니까?

어찌 보면 여인들의 답변은 해학적이고 비꼬는 뜻한 대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왕은 더 이상 산파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비 못하고 히브리 민족의 번성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왕을 가지고 노는 뜻한 산파들의 이 용기와 지혜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일어난 결과 이고 지금도 계속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누구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면 이런 용기와 지혜가 생기는 줄 믿습니다.  이것은 산파들의 가지고 있는 권력과 백그라운드, 정치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출 1: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하나님은 그런 산파들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는 지혜의 은혜 였습니다. 여인들의 지혜는 이미 왕의 지혜를 능가했고, 히브리 민족을 보호하기에 넉넉했습니다.
산파들에게 이 지혜는 언제 온 것입니까? 그 지혜는 산파들이 히브리 민족의 남자아이를 죽이라는 왕의 명령을 받고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니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솔로몬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고 두려워 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솔로몬은 그 지혜로 천하는 얻었습니다. 당시 최고 강한 자가 되었습니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비천한 히브리인 산파의 입을 통해서 바로의 지혜를 무너뜨렸습니다.

지혜는 악한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세상에 보여주는 가장 정확한 도구입니다. 그런데 이 지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경외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에게 지혜의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 산파들의 사명

산파에게 왕을 능가하는 지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산파들에게 왜 그런 지혜를 주셨을까요? 그들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주셨을 까요?  하나님이 산파들에게 지혜를 주신 것은 생명을 살리라고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산파들의 사명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산파들을 생명을 살린다는 것은 죽은 것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살아 있는 것을 살도록 돕는 것이 산파들의 사명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 교회들의 사명과도 같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영혼을 살리는 사명입니다.  교회는 죽어 있는 영혼을 살릴 능력이 없습니다. 교회가 영혼을 살리는 사명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을 잘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것이 산파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바로 왕이 한 말 중에 남자아이거든 죽이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의도적으로 숨을 쉬지 못하도록 입을 막든가 아니면 양수로 가득한 입에 손을 대지 않고 방치 하라는 뜻입니다.

요즘 한국교회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죽임을 당하고 있든지, 숨이 막혀 있는 교회를 방치 했든지 결과적으로는 죽고 있습니다. 현재 살아 있다는 교회와 성도들은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2005년 한때 860만 성도, 천만성도를 운운했었는데, 지난 10년 사이 계속 감소해 지금은 4~5백만 명도 안 된다는 통계를 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1년에 3천개의 교회가 문을 닫고, 주일학교 없는 교회가 50% 가 넘는 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죽고 죽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무너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산파의 사명입니다. 산파의 사명은 사람을 살리는 사명입니다. 주께서 주신 새 생명을 받아내는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는 산파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은 영혼을 살리는 사명입니다. 우리는 이 사명 앞에 겸허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소리를 치며 새 생명을 내 보내는 어머니 앞에서 서 있는 산파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새 생명을 주시고자 절규하는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에서 설교준비를 하다보니 소방서에서 큰 소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창가로 내다 봤더니 소방대원들이 대양한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 호수를 가지고 뛰는 훈련, 4층에서 밧줄을 내려고 소방호수를 끌어 올리는 훈련, 오토바이를 타고 출동하는 훈련 등, 아마 신입 소방대원들이 들어 온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소방학교가 따로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정해진 기간 동안 이미 훈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훈련, 위험에 빠져있는 사람들 구출하는 훈련, 위독한 환자를 응급처치 하는 훈련 등.

그런데 그들은 지역 소방서에 배정 받고 또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어제, 어떤 팀은 4층에서 밧줄을 내려고 1층에서 호수를 밧줄에 묶으면 끌어 올리는 훈련을 오전 내내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영혼을 구하는 기관입니다. 성도는 구급대원입니다. 우리 교회는 영혼구급대가 있습니다.  모세는 구급대장으로 애굽에서 고통 받는 200만 명의 사람들을 구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바로가 남자 아이이거든 죽이라는 명령을 했을 때 히브리 산파에 의해서 구출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대에는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산파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능력이 많으셔도 홀로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으시고 산파를 통해서 모세를 나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손을 통해 새 생명이 태어나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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