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로 다시간 사람들

작성자
gfgc
작성일
2016-04-06 17:28
조회
280
갈릴리로 다시 간 사람들
본문:요 21:1~14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개가 갈릴리 어민 출신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저마다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베드로와 안드레 등 4명은 어부 였으며, 마태는 세리 그리고 한명은 열심당원 그리고 나머지 6명의 직업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들 모두가 서민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가장 기대가 되는 것은 무조건 성공과 출세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난 왕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어도 그들은 언제가 자기들의 스승인 예수님께서 왕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런 확신을 갖게 하는 데는 시대적 상황도 한 몫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유대 나라는 지금 왕이 없습니다. 유대는 지금 로마로부터 억압과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랜세 월동안 왕을 기다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누가 보아도 왕같이 보였습니다. 누구도 정치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을 때 주님은 나라를 말씀하셨고 세상을 구원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나타나는 능력은 사람들을 따르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수 만 명이 모이는 집회에서 주님은 넉넉히 그들을 리더했습니다. 영락없는 유대 왕입니다.

이때 갈릴리 출신의 서민들은 얼마나 흥분되는 일입니까? 자기들의 힘이나 노력이 아닌 단순히 예수님께 부름 받았다가 큰 관리가 된다는 것은 갈릴리 출신인 어부들로썬 대단히 큰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그 찬란하던 꿈은 어느 금요일 날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왕이 되실 줄 알았던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힘없이 잡히시어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하게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큰 꿈을 잃은 제자들 하루아침에 큰 절망의 늪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큰 충격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찌 안 그러겠습니까?
한 순간 꿈과 소망을 다 잃은 제자들은 예루살렘이 싫어 졌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생겼습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자기들도 예수님처럼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이 예루살렘에 있어야 할 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제자들은 하나 둘 예루살렘을 떠나겠다고 선언 했습니다.

수 제자였던 먼저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3절)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형님이 가시면 우리도 함께 하겠다”고 동조하고 나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특별히 만든 70명의 전도대가 있었는데 그들도 모두 예루살렘을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동거 동락하며 훈련을 시키셨는데, 이렇게 다 떠나가면 앞으로 기독교의 복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어려움을 당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더 뭉쳐서 고난을 감수하자고 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수제자라는 베드로는 뭐하는 것입니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가 다른 제자들이 있는데 해야 할 말입니까?
그는 전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런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을 때 “다른 사람이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절대로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 부름 받아 사역 중에 제일 먼저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 주님이 찾아 가셔서 고쳐 주었는데 말입니다.

또한 그는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시는 수많은 이적을 보았지 않습니까? 소경이 눈을 뜨고, 귀 먹거리가 듣고,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게 보통 큰 은혜가 아닙니까?

그런데 결론적으로 그는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고향 갈릴리로 갔습니다. 이제 그에게 예수님은 과거에 한 사람, 추억일 뿐입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이었습니다. 여러분 생각도 베드로의 생각과 같습니까?

우리는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루살렘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죽지 않으셨으면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이것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20장 19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이 모여 있는 곳에 오셔서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말씀을 하셨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26절에는 도마를 위해서 8일 만에 또다시 똑같은 장소에 다시 오셔서 한 번 더 보여 주셨습니다.
그때 도마에게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는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그때 그 자리에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가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수제가 되어 “형은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말한 베드로를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떠나는 것은 이해 랄 수 있지만, 예수님이 죽으셨다가도 살아 나셨는데도 결국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신 것 때문에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베드로와 제자들은 왜 예루살렘을 떠난 것입니까?

1.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가 싫어서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동안 행하신 이들을 다 잊어서가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죽으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왜 떠났습니까?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한마디로 예루살렘에 대해 환멸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들 때문에 예루살렘이 싫어 졌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싫어졌습니다. 음모가 있고, 술수가 있고, 파벌이 있고, 싸움이 있고, 부패가 있고, 타락이 있는 예루살렘이 싫은 것입니다.
이유도 되지 않는 죄목으로 사랑하는 선생님을 못 박아 죽이는 저 잔인한 사람들이 있는 그곳은 무조건 싫다는 것입니다.
땀 흘리며 순순하게 물고기를 잡아서 하루하루 살아가던 갈릴리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에 일들은 받아 드리기 힘든 일이 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도시는 다 이렇다는 사실입니다. 뉴욕이라든가, 파리, 런던, 도쿄, 서울, 어느 곳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주님은 이런 사실을 다 아시면서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 음모가 있고, 술수가 있고, 파벌이 있고, 싸움이 있고, 부패가 있고, 타락이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 주님은 당신을 죽이려는 무리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도 인간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 예루살렘을 통해서 새 예루살렘이 건설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루살렘을 사랑했습니다.
여러분 그런 노래 아십니까?
예루살렘,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아! 호산나, 호호호산나 호산나 부르세.

오늘 제자들의 주님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환멸을 느겼습니다. 그리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환멸을 느끼는 그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환멸감을 느끼지 않는 땅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그런 땅이 있다면 주님이 계시는 저 영원한 예루살렘 천국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 음모가 있고 술수가 있고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어도 예루살렘에 들어간 것처럼 우리도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문론 세상으로 들어가려면 힘이 듭니다. 짜증이 나는 일이 있습니다. 죄와 유혹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를 지을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세상으로 안 들어갔더라면 너 낳았을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주님은 우리가 세상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에 그들을 붙들고 사정하듯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20:22절 “성령을 받으라.”
20:23절 “너희가 누그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지금 제자들은 주님이 주시는 성령을 받고 예루살렘에 남아서 사람들을 죄를 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떠났습니다.

요즘 티브이 방송을 보다보니 자연인이라는 프로그램이 자주 나오더라구요. 완전 내 스타일입니다. 자연에서 혼자 저렇게 살면 무슨 죄를 짓겠습니까?
산속에는 교회가 없으니까 도시에 있는 교회에서 구원의 상징인 세례를 받고, 그리고 산으로 가서 산열매 따먹으면서 매일 말씀 읽고 찬양 부르며 살면 죄를 지을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은 영적으로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이리와 사자가 있는 험지 같은 곳,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눅 10: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면서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함께 하겠다. 영원토록 함께 하겠다. 능력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힘들다고 내 팽개치고, 떠나고, 짜증을 부리지 말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그곳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믿고 가시기 바랍니다.

2. 성령을 따르지 않아서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한마디로 예루살렘에 대해 환멸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환멸은 철저히 인간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육신의 뜻대로 살면 이 땅에 환명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에 환멸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이는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환멸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나라를 떠나고 싶다고까지 말합니다.
왜 이런 것을 느끼고 심지어 버리고 떠나고 싶은 마음까지 드는 것입니까? 그것은 나라에 대한 주인의식이 없기 때문이 아니지 앉겠습니까? 내 나라이고 내 피와 땀으로 세워진 나라라면 환멸이 느껴지며, 감히 버리고 떠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주인의식입니다.
그러면 주인의식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주인의식은 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영적 주인의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즉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울은 로마인입니다. 그가 유대 땅에서 살면서 유대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 지도자로 기독교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을 체험하고 기독교로개종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유대교인들에게 핍박을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받는 핍박은 잡히면 죽는 핍박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그는 선교지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지에 있다가 로마로 들어가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그가 굳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때 모든 사람이 그를 말렸습니다. 그때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성령에 매여”
(행 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오늘 베드로와 제자들은 아직 성령을 체험하기 전입니다. 아니 거절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사랑하지 못했고 주인의식을 갖지 못했습니다. 주님도 그 사실을 잘 알고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이 성령을 체험하게 하려고 온갖 정성을 다하시고 계십니다.

낙심과 정말 중에 있는 사람을 무려 40일 동안 찾아다니시며, “예루살렘으로 다시 모리라 너희가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을 받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답입니다. 주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여 영광스러운 모습이지만,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여 세상에 그 누구보다 크게 영광을 받으셔야 하지만, 그 모든 영광을 뒤로하고 낮고 천한 모습으로 제자들을 찾아다니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아직 성령님이 오시기 전이라서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사는 세상에는 이미 성령이 오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충만하면 바울처럼 환멸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아멘

3. 갈릴리로 다시 간 제자들
결국 제자들은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으로 왔습니다. 아직 처분되지 않는 집은 여전히 그들에게 평안한 복음자리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난 제자들은 모처럼 평안히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배와 그물을 준비해서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오늘 3년 만에 처음 그물을 잡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혹시 그거 아세요? 물고기 잡는 것, 중독처럼 재미있는 것 말입니다. 낚시하시는 분들 보시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까?
3년 만에 처음 물고기 잡으러 가는 베드와 제자들의 마음을 어떠할까요? 예수님도 돌아 가셨기 때문에 죄책감도 없고 이제 본격적으로 물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꾸리려는 그의 가고는 담담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3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무것도 못 잡았습니다.
아무리 3년 만이라고 하지만, 베드로는 너무 이해가 안 되고 이제는 당황스럽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이것은 정말 아주 신기한 우연입니다.
세상 적으로 보면, 인간의 고뇌가 바로 이런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정말 열심히 했는데,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없을 때, 이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결코 베드로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다 수고의 그물을 던졌는데 이처럼 비어있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생각엔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긴 했지만 물고기를 잡는데 전혀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가 찾은 고향도 전과 그렇게 달라 보이지 않았습니다. 배도 조금만 수리하면 다시 쓸 수 있고, 그물은 한 체 장만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일은 베드로에게 또 다른 설래임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는 실패했습니다. 지난 밤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아주 이상하리 만큼 물고기가 안 잡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럴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 시 한번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래도 안 잡히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문제 입니까? 문제는 무엇이 문제인지모르는 것입니다.
그는 그날 무엇인 문제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그냥 실망하며 바닷가로 돌아왔습니다. 정말 다시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되어야 된 다면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지금 세상에는 이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그물을 내려 보는데, 결심이 없는 삶 말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물이 안 좋은 것입니까? 배가 안 좋은 것입니까? 아니면 기술이 부족한 것입니까? 그날이 물고기가 없는 날입니까? 내일 다시 잡아보면 많이 잡을 수 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여러분들에게 이런 상황이 온다면 우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편이십니까? 하나님의 뜻이라도 생각하시는 편이십니까?
저는 하나님의 관섭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경우는 아주 정확합니다.
이유는 바로 3년 전 베드로가 예수님께 처음 제자로 부름을 받을 때도 그랬었습니다. 그때도 아주 이상 하리 만큼 밤새 수고를 했는데도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베드로의 문제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에게는 부활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죽어도 사는 믿음)

다행히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물고기를 잡지 못해 당황한 베드로에게 말씀했습니다.
6절에 말씀입니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오른편에 던졌다가 153마리의 큰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누구나 다 베드로와 같은 삶이 있습니다.
즉, 베드로는 스스로 그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인생의 문제는 예수님이 오시면서 달라졌습니다. 3년 전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습니다.

문론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153마리의 큰 고기를 잡았다고 인생의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고 중요한 것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떠나 갈릴리로 갔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셨다는 것입니다. 전에도 오셨고 이번에도 또 오셨습니다.
전에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셔서 베드로의 이름을 부르시고 사명을 주셨지만, 이번에는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주님께서 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 베드로를 또 부르셨습니다. 19절에 “나를 따르라”
이제 오늘 이후로 베드로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일이 생길 것입니다. 이유는 부활이요 생명이요, 능력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오셨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베드로에게 나타난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 되는 능력은 그 이후로 영원한 줄 믿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을 떠난다 하더라도 주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따라 다니시며 보여주시고 깨닫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들께서 그 은혜가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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