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의 부탁

작성자
gfgc
작성일
2016-07-08 15:38
조회
573
부자의 부탁

누가복음 16:19~31

2016.06.19. 강북꽃동산교회 주일오전

참여정부 시절에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내신 유시민씨께서 목회자들 모임에 오셔서 강연을 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분은 강연에 앞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히셨습니다.
“나는 원래 기독교인이 아니고, 과거에 기독교에 대해서도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보건복지부 장관이 된 뒤에 생각을 바꾸게 됐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어렵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곳을 살펴보니까 70% 이상이 기독교계통이라는 것을 알게 됐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생각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은 정치 지향적 행태를 보였고 그리고 대형교회들의 부정적인 보면서 좋지 않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데 기독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자세히 살펴보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삶이 나누는 삶을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 어렵고 소외된 곳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어려운 이웃을 돕고 보살피는 일에 앞장 선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아이티, 네팔 같은 곳에 지진이 났다고 하면 제일 먼저 달려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필리핀, 방글라데시 같은 곳에 태풍이나 홍수로 피해를 보았다고 하면 제일 먼저 달려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길거리 노숙자들에게 제일 먼저 다가간 사람들도 그리스도인들이고, 미혼모와 탈북자 다문화 가정에 따뜻한 손길을 제일 먼저 펴는 사람들 역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가 잘아는 션 부부, 김장훈과 같이 ‘기부천사’라고 알려진 사람들 대부분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을 정의해 보라고 하면 나누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왜 이렇게 하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는 중요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사람들에게 물질을 주시고 구원을 주신 것은 나누고 섬기라고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는 이 사명을 목숨과 같이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한 부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은 이 부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을 했습니다. 자색 옷과 베옷을 입었고, 매일 호화롭게 즐기며 살았다. 갖고 싶은 것은 모든 것을 다 갖았고, 부족함이 전혀 없는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집 대문에서 거지가 한 사람이 늘 있었는데, 그의 집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면 그것을 먹고 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부자도 죽고 거지도 죽었는데, 부자가 불꽃이 뻘뻘 타오르는 지옥에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지는 천국에 갔습니다.

문제는 부자가 문제입니다.
그는 거기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고 다만 불의 뜨거움을 그대로 느끼며 온 몸에 수분이 다 빠져 물 한방을 그리워하고 고통 중에 있습니다. 그는 어쩌다가 이렇게 됐습니까? 부자는 왜 지옥에 간 것입니까?

여러분은 혹시 알고 계십니까?
우리 개혁주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무조건 예수를 안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정상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믿음이 관한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누가 전도를 했다는 전도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질 않습니다. 따라서 부자는 전도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자가 지옥에 간 것은 부당하고 이해가 안다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우리에게 정신을 번쩍 나게 하는 것이 있는데, 부자의 집에서 나사로라 이름 하는 거지가 그의 대문에서 늘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온 몸에는 헌데 투성인데,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거지는 죽어서 천국에 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부자가 지옥에 간 것이 거지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까?
부자가 이 거지에게 무슨 악한 짓을 한 것입니까? 그래서 부자가 벌을 받아 지옥에 가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성경에 그런 증거가 없습니다.
오히려 부자는 그렇게 악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은 거지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 부자의 집에 와 있었음에도 불고하고 악하게 때리거나 내 쫓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여러분! 이것은 오늘 성경을 풀어가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 될 것입니다. 그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아주 중요한 성경의 답은 20절에 있습니다.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가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부자가 그 거지를 때리거나 학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거지가 그의 대문에 버려 둔채 있었다는 것이 부자가 지옥에 갈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 계실 것입니다. “차라리 거지가 그의 대문에 없었다면 부자가 지옥에 가가 않았겠다. 그래서 부자는 종들을 시켜서 거지가 대문에 있지 못하게 했어야 했다.”

맟습니까? 여러분 생각도 그렇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열왕기하 6~7장을 이해 하셔야 합니다.
엘리야 시대에 사마리아 땅에 전쟁이 났습니다. 아람왕 벤하닷이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고 성안에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고 성안에 사람들이 스스로 굶어 죽는 전략을 썼습니다. 그의 전략은 어느 정도 통했습니다. 그 때 성안에는 나귀 머리 하나에 80세겔에 거래가 되고 바둘기 똥은 은 5세겔에 거래가 도고 있었습니다. 그때, 성 안에는 배고 품을 견디다 못한 아기 어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오늘은 네 아기 내일은 우리 아기를 잡아먹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정말 인간이 사는 세상에 가장 비극적인 일이 성안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사마리아 성문어귀에 네 명의 문둥병자가 있었는데, 그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어찌 여기 않아서 죽기를 기다리겠느냐, 만일 우리가 성 안으로 들어가면 거기는 굶주림이 있어 굶어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 머물러도 역시 죽을 것이요. 차라리 아람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두면 살 것이요, 죽이면 죽을 것이요.”

그렇게 생각한 문둥병자들은 아람 진영에 항복하기 위해서 들어 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왼 일입니까? 그들이 아람 진영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병거와 말소리와 큰 군대소리로 아람의 군대들을 모두 도망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문둥병자들은 그것에서 실컷 먹고 은과 금을 취하여 모두 감추고 부자가 된 것입니다. 그때 그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우리에게 화가 밀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문둥병자들은 바로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가 왕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성에 더 이상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중단되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성 어귀에 있던 문둥병자들입니다. 오늘 부자의 대문에서 얻어먹는 거지가 이 문둥병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문둥병자는 사마리아 인중에 가장 큰 거지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에게는 아름다운 소식인 복음, 구원의 소식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부자의 대문에 있는 거지가 누구냐는 중요합니다. 그는 외형적으로는 못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남들이 거지라고 말합니다. 자의든 타이든 지금 현재 스스로 일어서서 어떤 일을 해서 생계를 위지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에게 기쁜 소식 복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22절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 품에 들어가고”라고 했습니다.

결국 부자에게 거지는 복음 즉,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자에게 거지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 속에는 믿음이 있고 축복이 있고 승리가 있고 구원이 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모르고 그 은혜를 대문 밖에 내버려뒀습니다. 그것이 부자의 실수 였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은혜를 주실 때 이렇게도 주실 수 있습니다. 따듯하고 화려한 예배실에서 뿐 아니라 작고 초라한 예배실을 통해서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국민일보 2013-07-28 실렸던 기사입니다.
교인수 1만 명이 모이는 미국 대형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날 이 교회는 새로운 담임목사가 부임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스티펙이라는 목사는 그날 노숙자로 변신해 주변을 어슬렁거렸습니다. 하지만 교인 중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온 사람은 불과 세 명에 불과했습니다. 스티펙 목사는 교회로 향하는 교인들에게 ‘음식을 사려고 하니 잔돈 좀 달라’고 했지만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어 교회에 들어간 스티펙 목사는 맨 앞자리에 앉았지만 예배 위원들의 저지를 받고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맨 뒷자리에 겨우 착석하게 되었습다. 이윽고 새로운 목사가 부임했다는 광고시간. 맨 뒷자리의 스티펙 목사는 노숙인 차림 그대로 강단에 올라갔고 교인들은 경악스러워했습니다.

그날 스티펙 목사는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40절까지를 읽어 내려갔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과 염소’ 비유로 누가 양과 염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었습니다.

이날 스티펙 목사는 자신이 겪었던 것을 말하면서 “나는 오늘 아침 교인들이 모이는 것을 봤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니었다. 세상에는 교인들이 많다. 하지만 제자는 부족하다. 여러분들은 언제 예수의 제자가 될 것입니까?”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화려하고 멋있는 신사를 통해서만 주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름다운 미인을 통해서만 주신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과 축복을 주실 때 우리 모두가 90%이상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람과 방법을 통해서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역사요, 교회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 모두는 우리 앞에 보여 지는 모두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일거라는 생각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부자의 실수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지옥에 간 것은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 아닙니다. 거지를 괴롭히고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도 아닙니다. 그가 지옥에 간 것은 거지를 대문에 버려진 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부자로서 물질에 만족을 누리다가 하나님이 보내신 은혜를 보지 못하고 그 은혜를 하찮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부자이다 가난하자 잘났다 못났다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은혜를 보지 못하고 내버려 두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옥에 간 부자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지옥에 간 부자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놀라운 일은 부자는 그 어머 어마한 지옥의 불꽃가운데 고생하면서도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나를 그 지옥에서 건져 달라. 나가게 해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나사로를 찼고(24) 있습니다.

우리는 부자가 지옥에서 나사로를 찾는 일에 주목해야 합니다. 전에는 대문에서 개들이 헌데를 핥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오늘은 나사로를 찾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4절에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에 물 한 방울이라도 찍어 자기의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너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있어서 오갈 수 없다”는 답변을 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계속 나사로를 찾고 있습니다. 이 번에는 왜 찾은 것입니까? 27~28절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내 오형제가 있는데, 나사로를 보내서 그 형제들이 이곳에 오지 않게 해 주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부자의 말은 나사로를 세상에 보내서 자기의 오형제에게 전도, 복음을 전해주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이 부자의 요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사로가 왜 부자의 요청대로 세상으로 내려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자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30절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서 가서 전도하면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은 이 부자의 이야기는 듣기도 싫고 어림도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전도하지 못한 것을 왜 남에게 씨키려 하느냐? 아직도 나사로가 자기 집 문에 있는 거지 인 줄 아느냐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부자의 태도입니다.
그는 아직도 나사로에 대해서 함부로 대하고 거지로만 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가라하면 가는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지옥에서 그 엄청난 고난 속에서 부자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지옥의 고난이나 또한 지옥과 같은 세상의 고난도 사람을 변하 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변하게 하고 새롭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은혜로 변화를 받았고 그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아멘

성경은 부자의 소원을 들어 줄 수 없는 진짜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29절입니다. “세상에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부자는 떼를 쓰며 부탁을 합니다. 자기에 형제들은 모세와 선지자의 말은 안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살아서 전도를 하면 형제들이 나사로의 말을 들을 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즉,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전도를 하면 믿은 것이다. 즉, 기적을 보면 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공한 사람이 전도를 하면 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부를 많이 이한 사람이 전도를 하면 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나 전도사가 전도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사로처럼 거지가 주는 은혜는 아에 무시합니다. 너나 잘 먹고 잘 살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놀라운 사실은 은혜나 믿음 구원 축복, 성령님이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결코 이런 것은 인감의 힘으로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입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엡 2:8)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런데 하나님은 그 선물을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주시는데 오늘은 거지 나사로를 통해서 한 부자에게 주시려고 했습니다.

그럼으로 부자에게 가장 큰 은혜는 천국에서 살아서 내려간 나사로가 아니라 거지의 옷을 입고 대문에 와 있는 나사로 였습니다.

우리 주변에 구원의 대상이 있습니까?
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은 나사로가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어떤 돈 있고 말자하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나입니다.
신학을 공부한 목사나 전도사가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왜 그렇습니다. 믿음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전체 0